반박

처음에 일본군이 바라를 건너오자, 원균은 적의 규모에 놀라 나가 싸우지도 못하고 오히려 배 백여 척과 화포, 무기를 바다 속에 던져 버렸다. 그 후에 비장 이영남, 이운룡 등만 대동하고 배 네 척에 나누어 탄 채 달아나 곤량 바다 어귀에 상륙해 적을 피했다. 사태가 이렇게 되자 경상우수영 소속 수군 만여 명이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징비록』 
 
 경상우도 해안을 책임져야할 의무를 지닌 대장이라는 작자가 싸우지도 않고 오히려 겁에 질려버렸다. 또한 그는 자신이 이끄는 전함을 모조리 침몰시켰고 육지로 도망쳐 목숨을 보전하길 꾀하였다. 아무리 적들이 강력하다고 하나 일단 계란으로 바위치기로 한 번 쯤은 싸움을 해야만 한다. 더욱이 그에게는 싸움배가 무려 일백 척이 넘게 있었으니, 도전해볼 가치는 충분히 존재하였다. 만일, 그가 모든 전선을 소집하여 부산 앞바다에서 시위를 뽐내었다면, 일본군들은 후방을 걱정하여 파죽지세로 조선팔도를 횡단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경상우수사 원균은 이러지 못하였고, 부하 장수가 강력히 반발하여 겨우 바다에서 적들을 피하지 않았다. 경상우수사 원균, 그는 전형적인 ‘겁장’이었다.
 
 원균이 겁장으로 전락됨에는 『징비록』이 매우 크나 큰 역할을 하였다. 적들이 쳐들어오자 싸워볼 엄두도 안 내고 전선 일백 척을 제 손으로 침몰시키고 병사 일만 명을 해산시킨 전무후무의 겁장. 그렇지만 익히 들어 알기로는 훗날 삼도수군 전함을 모두 합쳐봐야 일백 척이 겨우 넘었고 병사들 또한 이하동문이었다. 과연 임진왜란 당시에 경상우도에는 수군 일만 명과 싸움배가 일백 척씩이나 있었을까?
 19세기에 조선 국가적인 차원에서 편찬한  만기요람  은 당시대 군사, 경제, 사회 등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은 정보를 알려주는 중요한 서적이다. 이 책에는 조선 수군에 소속된 고을과 군사기지는 물론, 각 포구에 전박된 전선들 수까지도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물론,  만기요람  이 제작된 시기와 임진왜란은 시기적 오차가 크고 전란 당시에는 없었거나 속하지 않았던 읍과 진이 포함되어 있어, 이 책으로 임란 당시 조선 수군 기지를 추측하기란 조금 무리이다. 하지만 많은 학자들이 임란 당시에도  만기요람  에 적힌 수군 기지와 그리 큰 차이가 없을 것으로 추측한다.  만기요람  에 따르면, 전라좌수영은 고을이 6개, 군사기지가 7개가 소속되었었다. 전라우수영은 고을 8개, 군사기지 19개로 이루어졌다. 경상우수영은 고을이 11개, 군사기지가 22개가 속하였다. 임진왜란 발발 연도인 1592년도에, 전라좌수군은 전함을 24척, 전라우수군은 25척을 보유하였음으로 이 수치를 토대로 계산해본다면 경상우수군은 전선을 30~40척 내외로 소유해야한다. 위 계산에는 주력 전함인 판옥선 수치이다. 협선이나 포작선과 같은 배가 있었지만 협선은 고작 3~4명이 승선하는 작은 배이고 포작선은 민간 어선임으로 이 선박들을 전투용이라고는 할 수 없다. 실질적인 전력은 판옥선이다. 많은 피를 흘려 조카를 쫓아내고 왕이 된 세조는 법전 편찬에 노력을 가하였고, 그 결시는 아들 성이 조선시대 기본법전인  경국대전  이 만들어짐으로서 빛을 발하였다. 15세기에 제작된  경국대전  에서는 수군 제도에 관한 내용이 언급되어 있다. 이 책에 따르면, 경상도에는 맹선이 266척, 전라도에는 186척을 보유하였다. 즉, 법적 내용으로는 임란 직전에 경상우도에서는 전선 일백 척 이상을 보유해야한다. 그렇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못하였다. 전라좌우도 싸움배를 모두 합쳐봐야 100척에는 한참 멀고도 먼 산이었다. 만일, 원균이 전선 일백 척을 쓰지도 않고 수장시켰다고 지적한다면, 전라수사 두 명은 법을 지키지도 못하였다. 물론,  경국대전  에서 언급하는 싸움배는 임진왜란 당시에 주력함이었던 판옥선이 아니라 판옥선보다 좀 더 작은 맹선을 말한다. 그렇지만 대맹선과 중맹선 같은 경우에는 판옥선과 견주어 볼 때에 그리 큰 손색이 없는 전선이다. 법에 따르면, 80명씩 승선하였던 대맹선이 경상도에는 22척, 전라도에는 20척씩 정박되어 있어 대형 싸움배 수엔 그리 큰 차이가 없다. 결론을 말하자면, 조일전쟁 직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는 비슷한 수효의 싸움배를 보유하고 있었다. 단지, 충무공께서는 선견지명으로 전란을 미리 예측하신 까닭에, 1년 전부터 전쟁을 준비하셨고 전라우수영에 버금가는 싸움배를 갖출 수 있었다.
 
  만기요람  에 따르면, 19세기 조선에는 각 수군진영에 소속된 장졸의 수가 경상우수영에는 8,638명, 전라우수영에는 7,443명, 전라좌수영에는 3,615명로서 경상우수영이 전라좌수영에 비하여 약 2.3배 정도가 더 많았다. 반면에 전라우수영과 견주어볼 때에는 큰 차이가 없다.  경국대전  보다 앞서 편찬된  세종실록  에 이르길, 경상도에는 수군이 16,602명, 전라도에는 10,600명이 있었다. 그렇지만 7년 전쟁을 맞이하였을 때에 전라도 수군(판옥선 한 척당 승선 인원을 130명으로 계산)은 7,000명 이하였다. 일본군이 승리를 거두었던 임진왜란 7년 전쟁 첫전투 장소인 부산진은 경상좌수영 소속으로 일본으로 향하는 제1관문이자 군사적 요충지였다. 그럼에도 부산진에 고작 판옥선, 방패선, 중선이 각각 한 척씩 밖에 정박되어 있지 않았다. 이중에서 싸움배는 판옥선 한 척뿐이다. 나머지 진영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당시대 인물인 서양인 선교사 프로이스가 쓴  일본사  에 따르면, 부산성을 지키던 병사가 600명이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같은 책에서 동래성을 수호하던 병력과 이일이 이끌던 병력이 각각 2만 명, 신립은 8만 명을 이끌었다고 기록된 점으로 미루어보아 과장된 수치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일본군 장수들이 자신들이 세운 전공을 자랑하기 위해 서양인 선교사들에게 과장되게 말하였을 것이다. 조선 후대 기록에 따르면, 정발은 처음에 해전을 시도하려고 전선을 이끌고 나갔으나, 적들이 아군에 비하여 수백 배가 많기에 포기하였다고 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당시 부산진을 지키던 병사들은 200명 내외였음을 추측해볼 수 있다.  만기요람  에 의거하더라도 부산진에는 병력 250명 내외가 있었다. 더욱이 정발은 전란을 예측하고 준비를 하였던 장수였다.  징비록  에서 말하는 전선 일백 척과 병사 일만 명은 법에 의거한 규모이다. 다음은 동일 기록에 등장하는 내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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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럭 조선에 와보지도 못한 선교사 기록을 신뢰하시다니 할말이 없네요;; 
 



각 마을에는 문서상으로만 무기가 갖추어져 있을 뿐, 실제로 필요한 무기는 없는 상태였다.
『징비록』
 
 임란 직전에 여러 관아 창고에서는 무기가 녹이 쓸어갔고, 포구에 정박된 싸움배들은 썩어 들어갔다. 더욱이 사람들은 오늘날과 마찬가지로 군역을 몹시 꺼려하였다.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대신 군역을 지게 하는 대립이나, 근무 순서가 되어온 병사들에게서 포를 받고 돌려  보내는 방수군포가 일반화되었다. 게다가 16세기 중반에 이르면 중앙군인 5위 병사들에 한해서, 불법적으로 행해오던 대립을 합법화하였다.
 여기다가 결정적인 자료가 있다. 이순신 장군께서 쓴 장계들 중에서 전라좌우수영에 속한 관포 수를 적어둔 기록이 있다. 임란을 맞이했을 때에, 전라좌수영은 5관5포로, 전라우수영은 18관 12포로 이루어졌었다. 두 진영에선 각각 전선 24척과 25척을 보유했었다. 이순신 장군께서는 선경지명으로 전란을 예측하셔서 15개월 전부터 부지런지 전쟁 준비를 하셨음으로 예외이다. 전라우수영은 한 포구에 전선이 한 척씩도 전박되어 있지 않았다.
 당시, 경상우수영에는 수군이 1만 명씩이나 있었을 가능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다. 원균은 전선을 침몰시켰지만 그때 그에게는 100여 척이라는 배가 없었다. 기껏해야 20~30척 사이이다.

[출처] 임진년의 비장 원균|작성자 견룡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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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영이 설치된 곳은 전라, 경상도가 각 2개소, 충청, 경기도가 각 1개소이고요.나머지 다른 도에는 독립된 수사가 없고 관찰사나 병사가 수사를 겸임했어요.이는 경상도와 전라도 등 그 전 시대에 왜구가 창구러했던 남해안 연안에 수군이 집중됐다는 뜻이고요. 수영 중에서 특히 경상우수영과 전라우수영이 가장 규모가 컸어요.관할 해역이 낙동강 서쪽부터 남해현까지인 경상우수영에 소속된 수군 진포는 전쟁 중에 변동이 조금 있지만 대략20개 정도 였고요.전라 좌수영의5포에 비해 4배나 되는 대규모였어요.당시보다 인구가 훨씬 더 적었던 세종 대에도 경상도 수군은 총 15,000여 명에 달했습니다.
선조 실록 27년 6월 21일자, 비변사가 임금에게 올린 보고를 보면 모든것은 명백히 드납니다.비변사 보고에서 당시 수군 정원은 평상시 기준으로 전라도 수군이 11,836호에 3保를 합쳐 47,300여 인, 충청도 수군이 6,853호에 3보를 합쳐 27,400여 인이라고 했고요.병력은 양인을 세는 단위인 ㅇ인人으로만 계산했으므로 수영에 소속돼 직업군인화한 아전과 진무, 그리고 전쟁 중에 징발된 공사천 노비는 전혀 가산되지 않은 순수 수군 병력이에요.게다가 임진왜란 직전 전쟁을 대비해 하삼도의 군정은 충분히 갖췄어요.경상도 수군 숫자는 이 보고서에 언그이 없으나, 충청도와 전라도 수군 숫자는 <세종실록지리지>에 나온 것과 유사해요.세종 대에 충청도 수군은 7,850인, 전라도 수군은 11,793인이었고, 경상도 수군은15,934인이었어요.인구 증가와 관련 ㅇ벗이 지역별로 수군을 증강하고 감축한 사례가 많으나 결과적으로 세종 대와 임란 당시 수군 총원은 비슷한 숫자가 된 셈이죠.
경상도는 세종 당시 15,934인에 3보를 합치면 63,736인에 이르죠.임진왜란 직전에 경상도 수륙군 병력을 특별히 증강하고 수군 진포를 증설했으니 임란 당시 수군은 세종 때 보다 적은 숫자가 나오지 않는다.이것을 보더라도 <징비록>에 언급한, 원균이 해산시킨 수군 1만여 병력은 예비병력 역할을 겸하는 보인保人을 빼고도 충분히 나오죠.경상좌수영의 규모가 경상우수영보다 훨씬 작기 때문이죠.그리고 <징비록>에서 언급한 100여 척 전선은 모두 명백히 판옥선입니다.당시에는 협선과 사후선 등이 포함되지 않은 주력 전서인 판옥선마을 전선으로 취급했기때문이죠.실록에서 판옥선으로 검색하면 얼마 나오지 않아요.반면, 조정에서 조선 수군의 주력 전선인 판옥선을 보통 부르는 말은 전선戰船 이었습니다.그리고 님처럼 개전 초기에 수군 병력을 동원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핑계를 대는 사람이 많은데요.이것도 말이 안되요.수군은 상번과 하번으로 나눠 절반 이상의 병력이 항상 수영과 각 진포에서 근무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에요.그리고 수군 진포가 아닌 거제현과 남해현 등 경상우수영 고나할 각 고을 소속 수군도 동원하기 어렵지 않아요.고을 소속 수군 대부분은 바로 그 동네 사람들이기 때문에요.경상좌수영의 소집령을 받고 움직인 수군과, 밀양에 집결한 경상우병영병력, 그리고 대구에 모여 순변사 이일을 기다리다가 흩어진 경상도 육군 등의 움직임을 보면 병사들이 단 며칠 만에 소집령에 응해 지정된 장소에 실제로 집결했어요.그런데 하필 경상우수군만 집결하지 못했ㄷ다는 것은 말이 안되죠.그리고 임진년 진주대첩과 이듬해의 2차 진주성전투는 무엇이겠습니까?진주가 임진년 내내 왜군에게 함락되지 않았다는 뜻이죠.만약 경사우수사 원균이 제대로 소집령을 발동했다면 비번인 수군이나 각 고을 수군이 집결지로 갈 길이 막히지 않아 지정된 도우언 장소에 충분히 집결할 수 있었어요.

원균은 일본군이 쳐들어오기가 무섭게 전함에 불을 지르고 도망쳤다.
 강덕룡은 임진왜란 초기에 원균 휘하의 비장이었던 사람으로, 당대에 칭송받던 영남삼룡 중 한 명이었다. 성여신이라는 사람이 강덕룡의 행장을 썼고, 그는 당시대 인물이었음으로 이 기록은 충분히 신뢰할 수 있다. 「강덕룡 행장」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임진년 봄(원문에는 여름이라고 적혀 있지만, 오기임으로 수정하였다.)에 왜구가 갑자기 이르니, 공[강덕룡]께서는 원균의 군영으로 달려갔으나, 아직 전선을 갖추기 못하였고 군사 도구 또한 없는 것이 많기에 원균에게서 계책이 나올 수가 없었다.
「강덕룡 행장」

[출처] 임진년의 비장 원균|작성자 견룡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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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장은 사료적 가치가 전여 없는 기록이에요-_-;;; 그냥 원균 행장 갔다내미시죠;;;ㅋㅋ



이건 뭐 글 전체가 근거도 빈약하고 가져다 쓴 사료도 몇개 없고 쫌 책좀 읽었다고 아는체나 하는 글이구만 이뭐..
이 밑에도 글이 더있어서 하나하나 반박하면서 쓰려다가 뭐 이건 글 전체가 헛소리라서 귀찮아서 패스
아직도 이런 존재들이 굴러다니는구나...ㅉㅉ

by 흑천황 | 2008/03/07 14:45 | 트랙백 | 덧글(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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